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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1일 수요일

미국 대통령 바위얼굴이 조각되기 까지

미국 대통령 바위얼굴이 조각되기 까지

미국 대통령 바위얼굴이 조각되기 까지
1923년 사우스 다코타주의 역사학자 로빈슨은 로키산맥의
블랙힐스(Black Hills)의 연봉 바위에 서부개척에 공로가 많은 몇몇
인물들의 초상을 조각할 것을 착안하고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지역 연방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과 의견을 모으고
인물 선정을 논의한 끝에 다음 네 명의 대통령을 조각하기로 하고
당시의 유명한 조각가 굿천 보글럼(Gutzon Borglum)을초청했다.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미국 초대대통령으로 위대한 미국의 탄생에 공헌한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독립선언문을 기안했고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해 국토를 넓힌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승리로 미연방을 살렸고 흑인 노예제도를 혁파한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서부의자연보호에 공이 컸고 파나마 운하구축등 미국의지위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대통령

죠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조각가 굿천 보글럼(Gutzon Borglum)



굿천 보글럼(Gutzon Borglum)은 1871년 아이다호 출신으로
샌프란 시스코와 프랑스 파리에서 조각 공부를한 사람이다
1925년 보글럼은 적당한 바위산을 찾아 답사에 나섰다.
길도없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천막을 치고 밤을 지새면서 공사에
알맞는 바위산을 찾아 2주간을 헤멘 끝에
15일째로 사우스 다코타주와 와이오밍주 사이 로키산맥중에 솟아 있는
블랙힐스(Black Hills)의 거대한 바위산 밑에 도달한 보글럼은
정상의 바위상태를 조사하기위하여 산에 오를 준비를 했으나 전문장비도
없이 500 피트가 넘는 절벽산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갖은 고생끝에 정상에발을 딛고 조사한 후에 이곳에
조각하기로 결심했다.



보글럼이 이곳에 조각하기로 결심한 러시모어 바위산(Mt,Rushmore)↓

작업의 준비

우선 3마일 떨어져 있는 키스톤(Keystone)에서 무거운 권양기(Winch)와
케이블, 착암기 등 작업에 필요한 물품들을 운반해야 할 도로가 필요했다

다행히 역사적인 일에 감동한 키스톤 마을 사람들이 대거 참여해 도로공사에
나섰으며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나 어린이들까지 자발적으로 참가해
원시적인 도로 를 산밑에까지 만들었다.
계단이 많아서 한 번 올라가는데 기력이 다 소진될
정도로 힘이 들었다고 한다

권양기를 정상에 설치하고 연결된 케이블로 작업도구와 폭파에
사용되는 다이나 마이트 등이 운반됐으나 계단을 이용하는
인부들이 지쳐서 작업능률이 오르지 않자 나중엔 권양기 케이블에
부착한 상자를 타고 오르내리게 했다.

이 때 만든 계단 수가 760개나 되며 수직으로 올라가다시피 하는


케이블에 매달려 조각 그네모양의 의자를 케이블에 매달고 인부들이
타고 상하좌우로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작업도중 실수로 떨어지지 않게 안전벨트를 장치했으며
지시 사항을 전달하게 인부들이나 권양기 운전사가 잘 보이는 곳에
소위
콜보이를 배치하여 양쪽의 말과 신호를 전달하는 방법을 썼다.
대통령의 호소로 전국적인 모금운동 작업자체의 어려움과
자금조달 문! 제등이 있어 1927년 8월에 드디어 조각작업이 시작 되었다
당시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는 러시모어 산을 '미국민의
역사적인 기념지역' 으로 정하고 모든 국민이 적극 돕자고 호소하여
노인으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전국민이 모금운동에 참여해 오늘날의
이 위대한 조각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2대에 걸쳐 완성

네개의 얼굴 윤곽이 완성단계에 들어서고 팔과 손 그리고 입은 옷 등의
작업에 들어갈 무렵인 1942년 봄 어느날 갑자기 보글럼이 심장마비로사망했다.

돌발적인 보글럼의 사망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처음부터 아버지
옆에서 조수 역할을 한 아들이 감독직을 맡아 시작 14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미국 여행가이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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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모습들





















작업하는 인부의 모습을 보면 조각상 얼굴의 크기가 짐작이 된다;















2015년 10월 17일 토요일

2015년 9월 20일 일요일

말(言)에 담긴 지혜(智慧)

  

 
01.무시(無視) 당하는 말은
   
 바보도 알아듣는다.

 
02.말은 입을 떠나면 책임(責任)이라는
   
추(錘)가 기다린다.
 
03.지적(指摘)은 간단(簡單)하게,
 
   
칭찬(稱讚)은 길게
 
04.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잔소리는 용서(容恕)가 안 된다.
 
05.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

06.농담(弄談)이라고 해서
   
 다 용서(容恕)되는 것은 아니다.
 
07.표정(表情)의 파워(power)를 놓치지 말라.
 
08.서서(徐徐)한 변화(變化)에
   
찬사(讚辭)를 보내면 큰 것을 얻는다.
 
08.서서(徐徐)하다는 동작이나 태도가
   
급하지 아니하고 느리다.
 
09.말을 하기 쉽게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쉽게 하라.
 
10.흥분(興奮)한 목소리 보다
   
낮은 목소리가 더 위력(威力)이 있다.

 
11.덕담(德談)은 많이 할수록 좋다.
 
12.잘난 척 하면, 적(敵)만 생긴다.
 
13.두고두고 괘씸한 생각이 드는 말은
 
    위험(危險)하다.
 
14.말을 독점(獨占)하면 적(敵)이 많아진다.
 
15.작은 실수(失手)는 덮어주고 큰 실수(失手)는
   
단호(斷乎)하게 꾸짖는다.
 
16.지나친 아첨(阿諂)은 누구에게나 역겨움을 준다.
 
17.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한 비밀(秘密)을
   
 털어 놓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이다.
 
18.쓴 소리는 단맛으로 포장(包裝)해라.
 
19.험담(險談)에는 발(足)이 달렸다.
 
20.단어(單語) 하나 차이(差異)가
   
 남극(南極)과 북극(北極)의 차이(差異)다.
 
21.진짜 비ㅁ빌(秘密)은 차라리 개(犬)에게 털어 놓아라.
 
22.말도 연습(練習)해야 나온다.
 
23.허세(虛勢)에는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 않는다.
 
24.약점(弱點)은 농담(弄談)으로도 들추어서는 안 된다.

 
25.넘겨짚으면 듣는 사람 마음의 빗장이 잠긴다.
 
26.때로는 알면서 속아 주어라.
 
27.남에게 책임(責任)을 전가(轉嫁)하지 말라.
 
 
 
“웅변(雄辯)은 은(銀)이지만
 
 
침묵(沈__)은 금(金)이다”
 








2015년 9월 6일 일요일

사람도 級數가 있다


칠푼이 팔푼이만 급수가 있는게 아니라
멀쩡한 사람도 다 급수가 있다.
그러나 학벌, 재산, 지위, 재주로
급수가 정해지는 게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세상보는 눈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사람 급수가 드러난다.
동서양 역사책에도 없고, 학교 교과서에도 없고,
스승의 가르침에도 없는 세상 보는 눈은
傳授(전수)가 아니요 生成(생성)이다.


씨눈이 틔여서
나무로 크는 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씨눈 어디에 나무가 들어있는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밤을 그려놓고 이러쿵 저러쿵
밤나무의 원초를 주장하고
정자 난자를 그려놓고 인간의 태초를 해설하나
공허하기 짝이 없듯이 세상보는
눈도 딱 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쁜 년이 바람나면 여러 사내 신세 망치 듯
유식한 놈에게 세상보는 눈이 잘못 박히면
여러 사람에게 해독을 끼친다.

세상이 시끄러운 게 어디
못 배운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잘못 배운 놈들이 많아서 탈이지.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범벅이 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빈 말이다.
세상을 볼 수있는 눈으로
사람을 보고 시대를 보고 역사를 보면

무위의 자유를 찾게 된다.

 
 
저 이름 모를 들새의 날개만큼만
세상 보는 눈을 높혀 보자.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계산된 허무이지만
빈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유스러운 자유인가
-좋은 글 중에서- 
 

2015년 9월 4일 금요일

실화-조선시대 부부 사랑법


 
 
 
진짜 멋있는 남편은?
진짜

멋있는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외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사람일까?
마음이 푸근하고 자상한 사람일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까?
 
내가 보기에
진짜 멋있는 남편은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만났을 때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후기 강정일당의 남편 윤광연이었다.
그는
아내를 배려하고 존경하는 차원을 넘어
한평생 자신의 부인이자
스승으로 여기며 살았다.

강정일당(1772~1838)은

충북 제천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강희맹의 후손으로
원래는
매우 유명한 가문이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명하여
벼슬하지 못한 탓에 겨우
양반의 신분만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16살 때 아버지를 여윈 뒤로는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어머니를 따라
삯바느질을 하고 베를 짜야만 했다.
 
2015082602069_0.jpg
 강정일당 사당



 


정일당은 20살 때
충주에 사는 14살의 윤광연과 결혼했다.
예로부터
금슬 좋은 부부 중에는
연상연하 커플이 많았는데,
그녀 역시 남편보다
6살이나 연상이었던 것이다.
 
윤광연의
아버지는 선비 윤동엽이었고,
어머니는 호가 지일당이었는데
시문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의 가문 또한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당대에 이르러 벼슬하지 못해
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정일당은 결혼한 후에도
친정에서 계속 머물다가,
3년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짐을 꾸려 시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가난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고향을 떠나 경기도 과천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아야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일당의 나이 43살에는
한양 남대문 밖 약현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정일당은 삯바느질을 계속하고,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며
조금씩 재산을 모아갔다.


좋은 부인이자 멘토였던 아내
정일당은

남편 윤광연의 부인이자 멘토,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학문이나 교유관계, 서당일,
일상생활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것의 조언자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윤광연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분주히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러자 정일당은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없다’면서,
자신이
삯바느질과 베짜기로
집안의 생계를 담당할 테니
남편에겐 뜻을 지켜
학문을 닦으라고 권유했다.
 

윤광연의 학문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정일당은
‘좋은 스승과 벗을 찾아
함께 배울 필요가 있다’면서,
당시
노론의 대학자인
송치규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도록 했다.
 


윤광연은
항상 부지런히 공부했으나,
안타깝게도 벼슬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정일당은
그런 남편에게 벼슬을 단념하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길 권했고,
 
윤광연도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찌감치
관직을 포기하고
재야 학자로 남아 학동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윤광연은 학동들을 가르치기에도
능력이 부족했는지,
정일당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서당일에 많은 도움을 주곤 했다.
 
 
 
대표적으로
정일당이 윤광연에게 쪽지편지를 보내
학동들을 선발하는 기준이나
공부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일러주는 장면을 살펴보자.

평민의 자제들 중에서도 뛰어난 아이들은

중국 고대의 하·은·주 시대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당에서
‘노귀’란 아이는 자상하고 명민하며,
이암’은 돈독하고 후덕하며,
‘유철’은 효성스럽고 신중하니
모두 가르칠 만합니다.
미천하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군자는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괴이한 현상이나
현란한 귀신에 대해서는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보건대
서당 아이들이 이해득실이나
괴담을 이야기하면서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엄하게 꾸짖어
바르게 공부하도록 하지 않습니까?
2015082602076_0.jpg

 '풍속도병' 중 서당, 작자 미상
 
뿐만 아니라
정일당은
윤광연의 의식주를 비롯한
낮잠이나 언어, 술, 흡연 등 생활습관까지도
세밀하게 뒷바라지하고 깨우쳐주었다.

옛날

문중자의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깨끗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의복은
검소하기는 하나 깨끗하지는 못합니다.
 
검소한 것은 당신의 덕이지만,
더러워졌는데도 빨지 못하고
뜯어진 것을 제 때에 깁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삼가
잿물로 씻고 바느질하여 주겠습니다.
낮잠은

기를 혼탁하게 하고
뜻을 해이하게 하며,
 
말을 많이 하면
원망과 비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술을
과음하게 되면
성품과 덕을 손상시키게 되고,
 
흡연을
많이 하게 되면 정신을 손상하고
거만함을 기르게 됩니다.
모두
다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처럼 정일당은

윤광연의
학문과 교유관계, 서당일, 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것들을 일러주었다.
 
특히
그녀는 척독(尺牘),

쪽지편지를 통해
수시로 남편에게 조언해주었다.
 
당시는
내외분별이 엄격한 시대요
집안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쪽지편지는
내외간의 은밀한 의사소통에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그것 때문에 부부 사이도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다.


아내의 문집을 간행한 이유?
정일당은

1832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고 난 후
윤광연은 지나칠 정도로 슬퍼했는데,
이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슬퍼함이 너무 심하도다.

이제 홀아비가 되어 살자니
신세가 처량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가난해서 빈소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예법대로 하지 못해서인가?
어찌
그리도 지나치게 슬퍼하는가?”
그 말에 윤광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어찌 그것 때문에 슬퍼하겠는가?
다만
나의 스승이 죽었으니,
앞으로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가 그것을 풀어주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도와주겠는가?
내게 잘못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바로잡아주겠는가?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훈계해주겠는가?
 
지극히 타당하고
바른 논의와 오묘한 뜻을 어디서 듣겠는가?
심신을 수양하고
품성을 닦는 방도를 어디서 배우겠는가?
 
내가 큰 과오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모의 가르침 때문이고,
스승과 벗으로부터 훈도를 받는 것도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은 역시 부인이었다.
 
이제
부인이 나를 두고 떠나니,
마치
닻을 잃은 배와 같고
길잡이 없는 장님과 같다.
멋대로 흔들리며 의지할 곳이 없고
이리저리 넘어지며 갈 곳이 없다.
이것이
내가 심하게 슬퍼하는 이유로다.”
 
2015082602076_1.jpg
 정일당유고


또한
윤광연은
정일당이 남긴 작품들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정일당유고』라는 문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주변의 이름난 문사들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보여주고 서문이나 행장,
묘지명, 발문 등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정일당의 문집이 더욱 빛날뿐더러
세상 사람들로부터
공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엔
여성들이
글을 지어 밖으로 내보내는 건
대단히 옳지 못한 일로 여겼다.
 
게다가 문집을 간행하면
집안 살림이 거덜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돈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윤광연이
자신도 아닌
아내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그처럼 애쓴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만큼
평소 아내를 마음 속 깊이
사랑했을 뿐 아니라
존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정일당과 윤광연은
부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모자 관계라 할 정도였다.
 
쪽지편지들에 나타난 정일당의 모습은
아내라기보다는
엄격한 어머니의 모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광연은
그런 아내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별다른 싫은 기색 없이 잘 따랐으니,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