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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8일 목요일

☆방탄소년단(BTS) 방시혁 대표 서울대 졸업식 축사 존경하는 오세정 총장님, 여러 교수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신 졸업생 여러분들과 가족, 친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방시혁 입니다. 오늘은 날씨조차 여러분들의 졸업을 축하하듯 화창한 것 같습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다는 건 무한한 영광이기에 총장님의 축사 제안을 덜컥 수락해 버렸지만 사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는 기성세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또 무엇보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첫 걸음을 내딛는 여러분께 해드릴 유의미한 이야기가 제게 있는지 우려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졸업 축사란 것은 결국 연사가 졸업생에게, 혹은 선배가 후배에게, 자신이 인생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꼰대’스러움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오늘은 최대한 솔직한 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제 자랑도 좀 하게 될 것 같고, 제 삶의 여정 중 여러분과 맞닿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198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공부를 조금 한다고 하면 법대를 가는 게 당연히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1지망도 법대였습니다. 법학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어떤 열정도 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목표와 성공의 요건에, 별 자의식 없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력고사는 다가 오고, 점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재수를 각오하고 법대를 쓰느냐, 법대를 포기하고 안전하게 서울대를 가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조금 전 말씀 드렸듯 법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재수는 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법대 다음으로 커트라인이 높은 과를 가려니까, 뭔가 되게 없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과들을 뒤지다가 미학과를 발견했습니다. 법대를 기대하셨던 어른들의 반대는 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떨어지면 재수는 없다’라고 반 협박조로 (대응해) 무사히 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미학과가 저와 너무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미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수업들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원래 예술도 좋아했었고 탁상공론을 좋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미학과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중학교 때부터 해왔던 음악은 뒷전으로 밀렸고 음악을 직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게 됐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쩌다 음악 프로듀서가 되었을까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많은 분들께서 서울대생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까지는 대단한 에피소드나 굉장한 결단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시는데, 사실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음악을 하고 있었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정말 허무하죠? 저는 그렇게 허무하게, 뭔가에 홀린 듯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1997년부터 직업 프로듀서의 길에 들어서 박진영씨와 함께 JYP라는 회사를 창업하고, 그 후 독립해서 지금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프로듀서로 살고 있습니다. 우스운 게 독립한 후에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왜 회사를 차리겠고 생각했는지 선택한 이유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서두부터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제 인생에 있었던 중요한 결정들, 훗날 보면 의미 심장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 때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사실 큰 그림을 그리는 야망가도 아니고,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인 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저와 방탄소년단,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행보를 보면 이런 말이 믿기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에서 2년 연속 톱 소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고, 4만 석 규모의 뉴욕 시티필드 공연을 순식간에 매진 시켰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래미 어워드에 시상자로 초청받으면서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을 세웠습니다. 외신에서는 감히 ‘YouTube 시대의 비틀즈’라는 과찬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 전 세계 주요 지역 스타디움에서 월드투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는 영광스럽게도 빌보드가 뽑은 25인의 혁신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저희 회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업계 혁신의 아이콘이자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아마 뉴스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접하셨을 때 이런 성공 뒤에는 분명 원대한 꿈이 있었거나, 방시혁은 엄청난 야심가여서 큰 미래를 그려놓고 이를 차근차근 실현해가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야심은 둘째치고 꿈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겁니다. 매번 하고 싶은 것들을 아무렇게나 하고 그렇게 선택하다 보니 어쩌다 이 자리까지 왔다? 물론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잠깐 바꿔 볼게요. 여러분! 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이 표현을 찾아냈는데 이게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 같습니다. 오늘의 저와 빅히트가 있기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불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 더 잘 할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튀기 싫어서, 일 만드는 게 껄끄러우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게 싫어서, 혹은 원래 그렇게 했으니까, 갖가지 이유로 입을 다물고 현실에 안주하는데요. 전 태생적으로 그걸 못 하겠습니다. 제 일은 물론, 직접적으로 제 일이 아닌 경우에도 최선이 아닌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게 되고 그럼에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만이 분노로까지 변하게 됩니다. 아마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멘토로 저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참가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분노를 폭발시키는 제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굉장히 많이 비호감이었죠? 그때 이후 그런 형태의 분노 표출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이제는 그렇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지만 그 모습이 제가 ‘불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설명하기에 좋은 예인 거 같아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그런 저의 성정은 제 작업과 제가 만든 회사의 일에도 똑같이 발휘됐습니다. 최고가 아닌 차선을 택하는 ‘무사 안일’에 분노했고, 더 완벽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데 여러 상황을 핑계로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관습과 관행에 화를 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를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음악 산업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산업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불공정과 불합리가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이 세계를 알아가면서 점점 저의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이용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곡가로 시작해 음악 산업에 종사한 지 21년째인데, 음악이 좋아서 이 업에 뛰어든 동료와 후배들은 여전히 현실에 좌절하고 힘들어합니다. 음악 산업이 안고 있는 악습들, 불공정 거래 관행, 그리고 사회적 저평가. 그로 인해, 업계 종사자들은 어디 가서 음악 산업에 종사한다고 이야기하길 부끄러워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음악 회사를 일은 많이 시키면서 보상은 적게 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K-Pop 콘텐츠를 사랑하고, 이를 세계화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팬들은 지금도 ‘빠순이’로 비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업계와 사회가 나서서 찬양하고 최고의 예우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왜 이런 대우를 하는 지, 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고 화가 납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며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우리 아티스트들은 근거 없는 익명의 비난에 힘들어하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우리 피, 땀, 눈물의 결실인 콘텐츠 역시 부당하게 유통되거나 저평가 되며 부도덕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분노하게 되고 이런 문제들과 싸워 왔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는 혁명가는 아닙니다. 다만, 음악 산업의 불합리, 부조리에 대해서 저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외면하고 안주하고 타협하는 것은,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원대한 꿈이 있거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제 눈앞에 있고 저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그 분노가 제 소명이 됐다고 느낍니다.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온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화를 내는 것. 아티스트와 팬들에 대해 부당한 비난과 폄하에 분노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상식이 구현되도록 싸우는 것. 그것은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한 음악에 대한 저의 예의이기도 하고, 팬들과 아티스트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이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제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 같습니다. 저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일 학업과 업무에 시달리던 고단한 몸을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뽀송뽀송한 이불 속에 들어갈 때 행복하지 않나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복한 것들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행복한 상황도 있을 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여러분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한지 먼저 정의를 내려보고, 그러한 상황과 상태에 여러분을 놓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두 번째 행복의 정의에 입각해서, 저의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특히 우리의 고객인 젊은 친구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더 나아가 산업적으로는,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킴으로써 음악 산업을 발전시키고 종사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하는 것.” 그래서 그 변화를 저와 우리 빅히트가 이뤄내는 게 저의 행복입니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제가 앞에서, 저는 구체적이거나, 커다란 꿈이 없다고 했죠? 맞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어떤 기업이 될 지, 방탄소년단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 지, 심지어는 제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 지에 대해서도 그림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저의 모습을 외부에서 보면 커다란 꿈을 향해 끊임 없이 정진하는 듯 보일 겁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저와 제 주변사람들, 제가 봉사해야 하는 고객들의 행복까지 빚어낸 매우 이상적인 상황으로 보일 겁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듯, 이런 시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께 위로와 행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 꿈이 아니라 제 불만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겁니다. 알 지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쓸 바에,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음악 산업이 처한 수많은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매진할 것이며, 방탄소년단은 아시아 밴드, 혹은 K-Pop 밴드의 태생적 한계라고 여겨지는 벽을 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할 겁니다. 저 역시 이런 일을 수행하는 데 부끄럽지 않게 끊임 없이 반성하고 제 자신을 갈고 닦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큰 꿈이 없다고 구체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소한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무엇이 진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지 고민하십시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남이 정해 준 여러 가지 기준들을 좇지 않고, 일관된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십시오. 본인이 행복한 상황을 정의하고, 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끊임 없이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소명이 되어 여러분의 앞길을 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여러분의 행복이 상식에 기반하길 바랍니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본인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바깥 세상에 대해 끊임 없는 관심을 유지하고, 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상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신의 행복을 좇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두서 없는 저의 축사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대학이라는 일생에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정을 잘 마무리하신 여러분, 다시 한 번 격하게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인생의 다음 단계들을 !

☆방탄소년단(BTS) 방시혁 대표
    서울대 졸업식 축사

존경하는 오세정 총장님, 여러 교수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신 졸업생 여러분들과 가족, 친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방시혁 입니다.

오늘은 날씨조차 여러분들의 졸업을 축하하듯 화창한 것 같습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다는 건 무한한 영광이기에 총장님의 축사 제안을 덜컥 수락해 버렸지만 사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는 기성세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또 무엇보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첫 걸음을 내딛는 여러분께 해드릴 유의미한 이야기가 제게 있는지 우려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졸업 축사란 것은 결국 연사가 졸업생에게, 혹은 선배가 후배에게, 자신이 인생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꼰대’스러움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오늘은 최대한 솔직한 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제 자랑도 좀 하게 될 것 같고, 제 삶의 여정 중 여러분과 맞닿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198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공부를 조금 한다고 하면 법대를 가는 게 당연히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1지망도 법대였습니다. 법학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어떤 열정도 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목표와 성공의 요건에, 별 자의식 없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력고사는 다가 오고, 점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재수를 각오하고 법대를 쓰느냐, 법대를 포기하고 안전하게 서울대를 가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조금 전 말씀 드렸듯 법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재수는 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법대 다음으로 커트라인이 높은 과를 가려니까, 뭔가 되게 없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과들을 뒤지다가 미학과를 발견했습니다. 법대를 기대하셨던 어른들의 반대는 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떨어지면 재수는 없다’라고 반 협박조로 (대응해) 무사히 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미학과가 저와 너무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미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수업들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원래 예술도 좋아했었고 탁상공론을 좋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미학과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중학교 때부터 해왔던 음악은 뒷전으로 밀렸고 음악을 직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게 됐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쩌다 음악 프로듀서가 되었을까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많은 분들께서 서울대생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까지는 대단한 에피소드나 굉장한 결단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시는데, 사실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음악을 하고 있었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정말 허무하죠?

저는 그렇게 허무하게, 뭔가에 홀린 듯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1997년부터 직업 프로듀서의 길에 들어서 박진영씨와 함께 JYP라는 회사를 창업하고, 그 후 독립해서 지금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프로듀서로 살고 있습니다. 우스운 게 독립한 후에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왜 회사를 차리겠고 생각했는지 선택한 이유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서두부터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제 인생에 있었던 중요한 결정들, 훗날 보면 의미 심장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 때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사실 큰 그림을 그리는 야망가도 아니고,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인 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저와 방탄소년단,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행보를 보면 이런 말이 믿기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에서 2년 연속 톱 소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고, 4만 석 규모의 뉴욕 시티필드 공연을 순식간에 매진 시켰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래미 어워드에 시상자로 초청받으면서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을 세웠습니다. 외신에서는 감히 ‘YouTube 시대의 비틀즈’라는 과찬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 전 세계 주요 지역 스타디움에서 월드투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는 영광스럽게도 빌보드가 뽑은 25인의 혁신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저희 회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업계 혁신의 아이콘이자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아마 뉴스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접하셨을 때 이런 성공 뒤에는 분명 원대한 꿈이 있었거나, 방시혁은 엄청난 야심가여서 큰 미래를 그려놓고 이를 차근차근 실현해가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야심은 둘째치고 꿈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겁니다. 매번 하고 싶은 것들을 아무렇게나 하고 그렇게 선택하다 보니 어쩌다 이 자리까지 왔다? 물론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잠깐 바꿔 볼게요.

여러분! 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이 표현을 찾아냈는데 이게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 같습니다. 오늘의 저와 빅히트가 있기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불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 더 잘 할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튀기 싫어서, 일 만드는 게 껄끄러우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게 싫어서, 혹은 원래 그렇게 했으니까, 갖가지 이유로 입을 다물고 현실에 안주하는데요. 전 태생적으로 그걸 못 하겠습니다. 제 일은 물론, 직접적으로 제 일이 아닌 경우에도 최선이 아닌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게 되고 그럼에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만이 분노로까지 변하게 됩니다.

아마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멘토로 저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참가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분노를 폭발시키는 제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굉장히 많이 비호감이었죠? 그때 이후 그런 형태의 분노 표출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이제는 그렇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지만 그 모습이 제가 ‘불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설명하기에 좋은 예인 거 같아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그런 저의 성정은 제 작업과 제가 만든 회사의 일에도 똑같이 발휘됐습니다. 최고가 아닌 차선을 택하는 ‘무사 안일’에 분노했고, 더 완벽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데 여러 상황을 핑계로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관습과 관행에 화를 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를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음악 산업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산업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불공정과 불합리가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이 세계를 알아가면서 점점 저의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이용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곡가로 시작해 음악 산업에 종사한 지 21년째인데, 음악이 좋아서 이 업에 뛰어든 동료와 후배들은 여전히 현실에 좌절하고 힘들어합니다. 음악 산업이 안고 있는 악습들, 불공정 거래 관행, 그리고 사회적 저평가. 그로 인해, 업계 종사자들은 어디 가서 음악 산업에 종사한다고 이야기하길 부끄러워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음악 회사를 일은 많이 시키면서 보상은 적게 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K-Pop 콘텐츠를 사랑하고, 이를 세계화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팬들은 지금도 ‘빠순이’로 비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업계와 사회가 나서서 찬양하고 최고의 예우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왜 이런 대우를 하는 지, 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고 화가 납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며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우리 아티스트들은 근거 없는 익명의 비난에 힘들어하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우리 피, 땀, 눈물의 결실인 콘텐츠 역시 부당하게 유통되거나 저평가 되며 부도덕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분노하게 되고 이런 문제들과 싸워 왔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는 혁명가는 아닙니다. 다만, 음악 산업의 불합리, 부조리에 대해서 저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외면하고 안주하고 타협하는 것은,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원대한 꿈이 있거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제 눈앞에 있고 저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그 분노가 제 소명이 됐다고 느낍니다.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온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화를 내는 것. 아티스트와 팬들에 대해 부당한 비난과 폄하에 분노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상식이 구현되도록 싸우는 것. 그것은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한 음악에 대한 저의 예의이기도 하고, 팬들과 아티스트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이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제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 같습니다.

저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일 학업과 업무에 시달리던 고단한 몸을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뽀송뽀송한 이불 속에 들어갈 때 행복하지 않나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복한 것들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행복한 상황도 있을 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여러분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한지 먼저 정의를 내려보고, 그러한 상황과 상태에 여러분을 놓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두 번째 행복의 정의에 입각해서, 저의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특히 우리의 고객인 젊은 친구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더 나아가 산업적으로는,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킴으로써 음악 산업을 발전시키고 종사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하는 것.” 그래서 그 변화를 저와 우리 빅히트가 이뤄내는 게 저의 행복입니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제가 앞에서, 저는 구체적이거나, 커다란 꿈이 없다고 했죠? 맞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어떤 기업이 될 지, 방탄소년단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 지, 심지어는 제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 지에 대해서도 그림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저의 모습을 외부에서 보면 커다란 꿈을 향해 끊임 없이 정진하는 듯 보일 겁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저와 제 주변사람들, 제가 봉사해야 하는 고객들의 행복까지 빚어낸 매우 이상적인 상황으로 보일 겁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듯, 이런 시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께 위로와 행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 꿈이 아니라 제 불만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겁니다. 알 지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쓸 바에,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음악 산업이 처한 수많은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매진할 것이며, 방탄소년단은 아시아 밴드, 혹은 K-Pop 밴드의 태생적 한계라고 여겨지는 벽을 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할 겁니다. 저 역시 이런 일을 수행하는 데 부끄럽지 않게 끊임 없이 반성하고 제 자신을 갈고 닦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큰 꿈이 없다고 구체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소한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무엇이 진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지 고민하십시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남이 정해 준 여러 가지 기준들을 좇지 않고, 일관된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십시오. 본인이 행복한 상황을 정의하고, 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끊임 없이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소명이 되어 여러분의 앞길을 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여러분의 행복이 상식에 기반하길 바랍니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본인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바깥 세상에 대해 끊임 없는 관심을 유지하고, 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상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신의 행복을 좇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두서 없는 저의 축사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대학이라는 일생에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정을 잘 마무리하신 여러분, 다시 한 번 격하게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인생의 다음 단계들을 행복 속에 잘 살아내시고 10년 후, 20년 후에, “내가 제법 잘 살아 왔구나”라고 자평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 묘비에 “불만 많던 방시혁, 행복하게 살다 좋은 사람으로 축복받으며 눈감음”이라고 적히면 좋겠습니다. 상식이 통하고 음악 콘텐츠와 그 소비자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그날까지, 저 또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갈 겁니다. 격하게 분노하고, 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여러분만의 행복을 정의하고 잘 찾아서, 여러분다운 멋진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졸업을 축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2월 26일 화요일

부부간 노사문제

✔부부간 노사문제🚫

❌배꼽잡습니다.♐
🐮함께 한번 웃어 볼까?^.~✨😆

♂고추들이 띠를 두르고 파업에 나섰다.
🔼자신들의 중노동에 대한 임금 인상 요구가 이유였다.🔽
✨첫째..♡
우리는 주로 야간이나 시간 외 근무를 하며..
🔴둘째....♡
조명도 없이 어두운 곳에서 일하고....
🔴셋째....♡
습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넷째....♡
간혹 숨통을 조이는 고무장비를 쓰고 일할 때도 있다.
💫이것은 3D업종으로 임금을 2배로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 이에 대한 홍합측 답변은..

💢임금 인상은 절대 불가..💢

🔥첫째....
고추는 8시간 일한적이 없으며...
💥둘째....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근무 성적을 낸적도 없고....
✔셋째....
야간근무 시간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넷째....
사용자의 요구와 상관없이 아무때나 일을 시작하기도 하고..
✔다섯째....
제 멋대로 퇴근해 버린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여섯째....
일은 못하면서 오물만 버려 사업장 청소만 귀찮게 한적도 많다.
✔일곱째....
시간이 갈수록 숙련은 고사하고 사용주를 만족시키지 못 할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여덟째....
일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용주 몰래 사업장을 바꾸려고 껄떡 거린다.💨
⚠그러므로 임금 인상은 고사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바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니 오늘 하루 신나게~ 즐겁게~
한번 실컷 웃어 볼까?😄
화이팅^^

♡ 좋은 친구님께서 보내주셨네요.

사용자의 말이 맞습니다.
고추노동자를 배격합니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주제에 임금 인상....... ?
주제파악도 못한 놈이
ㅎ ㅎ ㅎ

가만히 생각하니 둘다 맞는 글입니다.

70대 노인 별곡

70대 노인 별곡
당신도 알아주면 좋습니다

천천히 읽고 생각하는 30분 ~
전혀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차분히 하나하나
읽고 생각해 보세요 ~~^*

인생의 후반은
마무리의 시간들이다 ♧♧

정리하고 즐기며,
마무리 해야 한다는 마음 가짐이 중요할 것이다.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보았어도 못 본 척 넘어 가고,
내 주장 내세우며
누굴 가르치려 하지 말자..

너무 오래 살았다느니,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느냐는 등등~
스스로를 죽음으로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말자.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生의 환희 아니던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더라도
살아있는 人生은 즐거운 것이다.

가족이나 타인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더라도
그 책임은 나의 몫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노인의 절약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있는 돈을 즐거운 마음으로
쓸 줄 알아야 따르는 사람이 많은 법...

축구에서
전/후반 전을 훌륭히 마치고
연장전에 돌입한 당신의 능력을
이미 관중들은 충분히 알고있다..

연장전 에서
결승점 뽑을 욕심은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멋진 마무리속에 
박수칠때 떠날 수 있도록
멋진 '유종의 미'를 꿈꾸며 살아가자~!

그러기 위해서,

1.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라.

재산을 모으거나
지위를 얻는 것이
경쟁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황혼의 人生은 이제 그런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2. 권위를 먼저 버려라.

노력해서
나이 먹은 것이 아니라면,
나이 먹은 것을 내 세울 것이 없다.
나이 듦이
당신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권위도 지위도 아니다.
조그만 동정일 뿐이다~!

3. 용서하고 잊어야한다.

살면서 쌓아온
미움과 서운한 감정을 털어 버려야한다.

4. 항상 청결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추한 꼴 안 보이려는 것이
인간이 버려서는 안 되는 자존심이다!

5. 감수해야 한다.

돈이 부족한 데서 오는
약간의 불편,
지위의 상실에서 오는
자존심의 상처,
가정이나 사회로부터의
소외감도 감수해야 한다.

6. 신변을 정리해야 한다.

나 죽은 다음에
자식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사고방식은
무책임한 것이다.

7. 자식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

금전적인 독립은 물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얽매인
부모자식 관계를 떨쳐 버려라.
자식도 남이다.
그저 제일 좋은 남일 뿐이다!

8. 시간을 아껴야 한다.

노인의 시간은 금 쪽 같이 귀하다.
'시간은 금이다'라고 했지만
노인의 시간은 돈보다 귀하다!

9. 감사하고 봉사해야 한다.

삶의 마지막은
누군가에 의지해야 한다.
더구나 효성스런 자식이 없다면  더욱 그렇다.

세상에 고마움을 표하고
살아 움직일 수 있을 때
타인을 위해서도
미리 갚아 두어야 한다.

살아온 이 지구의 환경과
우리 사회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어야
성숙한 노년의 삶이다.

10. 참여 하라.

사회나 단체 활동,
혹은 이웃 간의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하라.
친구와 어울리고
취미활동에 가입하라.

11.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기를 것.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노인이 되고 세월이 흐르면
친구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줄어든다.

설혹 살아 있더라도 건강이 나빠
함께 지낼 수 없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아무도 없어도
낮선 동네를 혼자서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독에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12. 노인은 매사에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한다.

감사의 표현이 있는 곳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신기하게 밝은 빛이 비치게 마련이다.

축복받은 노후를 위해,
오직 한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택할 것이다.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는 한,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으며,
몸도 잘 움직일 수 없어,
대소변도 못 가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엄연한 인간이며,
아름답고 참다운 노년과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3. 새로운 기계 사용법을적극적으로
익히도록 해야한다.

새로운 기계의 사용 방법을 익히기가 어렵다.
몇 번씩 설명을 듣고,
여러 차례 설명서를 읽어보아도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그런  새 기계사용을포기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익숙해지도록 노력해라.
약간 불편하더라도 지금 상태가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징후는 젊은 사람에게도 있으나,
심리적 노화와 상당히 비례하는 것 같다.

14. 교통 혼잡한 출퇴근
시간대에는 이동하지 말 자.

노인이 러시아워의 혼잡한 시간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야할 경우는 흔치 않다.

교통이 혼잡한 시간대에는 외출을 삼가하여
출퇴근 하는 젊은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15. 짐을 들고 다니지 말 아라. 들어야 한다면 최소로 줄여라.

외출이나 여행을 할 때
노인은 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동행자가 없으면 자신이 피곤해지고,
동행자가 있으면 동행자에게 폐를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16. 입 냄새, 몸 냄새에
신경을 쓸 것.

노인이 되면
노인 특유의 냄새가 난다.
따라서 항상 향수를 휴대하여,
극히 소량씩이라도 사용하는 것이 좋다.

17. 나이가 들면 불결한 것에
태연한 사람들이 꽤 있다.

자주 씻을 것.
청결하게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동시에 주위사람들에 대한 예의 이기도하다.

그러므로
내의는 매일매일,
혹은 이틀에 한번씩, 자주 갈아 입고,
침구나 잠옷 등은 날을 정해서 더럽게 보이던 보이지않던 세탁하여야 한다.

18. 화장실을 사용 할 때에는 문을 꼭 잠그고~,
무릎은 가지런히 하고 변기에 앉을 것.
나이가 들면 화장실에 들어가서 무릎을 벌리고 변기에 앉거나, 문을 꼭 잠그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늙었다는 징조다.

이는 정신상태의 해이와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결여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19. 죽기 전에 자신의 물건들을 모두 줄여 나가도록 해라.

어렵지만 일기나 사진 등, 자식들이 꼭 남겨 달라고 하지 않은 것들은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즈음부터는, 조금씩 처분하는 마음 자세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재산도 마찬가지다.
아무 생각 없이 남긴 재산은 종종 유족들을 번거롭고 힘들게 한다.

더이상 나의 판단력이 흐려지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해 두자.

구심점 없어지는 그날,
혈육간의 분쟁이 발생치 않도록 하는 현명한 조치이기도 하다.

20. 친구가 먼저 죽더라도 태연할 것.

친구가 먼저 세상을 뜨는 일은, (남편이나 아내가 먼저 떠나는 것도 같다.)
늘~ 사전에 마음속으로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막상 닥친 운명에 대해
마음의 각오가 서게 된다. ‘드디어 헤어지게 되는 구나.’라고 한탄하기보다...

‘몇 십 년 동안 즐겁게 지내주어 고마웠어’라고
감사해 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곧 내차례가 올것이니까...

21. 허둥대거나 서두르지 않고 뛰지 않는다.

노인의 갖가지 심신의 사고는 서두르는데서 일어난다.

이만큼 살아왔는데, 여기서 무얼 더 서두를게 있겠는가?

노인이란
한 걸음 한걸음 걸어 나가면서, 인생을 음미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예술가'다.
노인이 되어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그런 연유 때문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무엇이든 느긋하게 하고,
느릴수록 좋다.

22. 매일 적당한 운동을
일과로 할 것.

나이가 들면 신체의 각 부위가 퇴화되는 현상이,
노년의 서글픔이다.

신체의 퇴화를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항상 몸을 단련하는 것이다. 평소에 가구나 구두, 기계류를 닦고 조이며 손질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처럼,,,.

하루 세 번 식사를 하듯,
매일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알맞은 운동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무리한 운동은 절대 금물이다.
자고로, 세월을 이기는 천하장사는 없다

23. 여행은 많이 할수록 좋다.

여행지에서 죽어도 좋다.
여행만큼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도 없다.
낮선 땅에서 낮선 사람들을 만나고,
낮선 음식을 먹는 것은
언제나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노년의 건조한 생활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여행은 많이 할수록 좋다.

2019년 2월 25일 월요일

🍎수덕여관  모정  이야기


        🍎수덕여관  모정  이야기
                세 남자, 세 여자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 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노라 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 이응로 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있던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어서 자주 만나려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 여사는 변치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 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날같은 희망으로 살아 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 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년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는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식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일본의 권위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 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 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봄날의 손님

🌷 봄을 가지고 온 아이(A child with spring)

아직 날씨가 쌀쌀한 봄날, 아동복 가게에 허름한 옷차림의 아주머니가 여자 아이와 함께 들어와서 말했다.
“우리 딸이 입을 예쁜 티셔츠 하나 주세요.”

가게 여주인은 아이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이나 괜찮아요. 엄마가 골라주면
다 좋아요.”

두 모녀가 옷을 고르면서 하는 대화에서 따뜻한 정을 느꼈다. 모녀는 만 원짜리의 티셔츠를 사가지고 나갔다.

그런데 얼마 뒤에 아이가 그 옷을 들고와서 말했다.
“저, 죄송한데요. 이거 돈으로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주인은 약간 불쾌감을 느끼면서 말했다.
“왜, 엄마가 사주신 것인데 무르려 하니? 엄마한테 혼나면 어쩌려구?”

아이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했다.
“사실은 엄마가 시장 좌판에서 야채 장사를 하셔요. 종일 벌어도 하루에 만 원을 못버실 때도 있어요. 엄마한테 미안해서 이 옷을 못 입겠어요.”

순간 가게 주인은 코끝이 찡해 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큰 사랑을 가지고 온 아이가 예뻐서,
“그래, 참 예쁜 생각을 하는구나. 이 돈은 다시 엄마에게 갖다 드리고, 이 옷은 내가 너의 그 고운 마음씨가 예뻐 선물로 주는 것이야.”

작은 청바지와 함께 예쁘게 싸서 아이에게 들려 주면서 말했다.
“마음씨가 예쁘니 공부도 잘하겠지만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옷가게 주인은  봄을 가지고 온 예쁜 마음의 아이 때문인지 하루 종일 손님도 많이 왔고 기분도 상쾌한 봄 날씨 그대로였다.

다음 날에 아주머니가 봄나물을 한 봉지를 가지고 오셔서 '아이가 무엇을 사주면 항상 그런다오.' 하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착한 딸 두어 좋으시겠어요. 아주머니가 부러워요.”

“예, 고생하는 보람이 있다오. 이 가게도
복 많이 받으시라고 기도하겠어요.” 

⭐김미경의 '봄날의 손님'에서 옮긴 글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