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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시운 (時運)과 천명 (天命)


시 운 (時運)과 천 명 (天命)

송나라 태종때
강직하고 후덕했던 명재상 여몽정 의 글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바람과 구름이 있고,

사람은 아침, 저녁(朝夕)에 있을 
화(禍)와 복(福)을 알지 못한다.

지네(蜈蚣)는 발이 많으나 
달리는 것은 뱀(蛇)을 따르지 못하고,

닭(鷄)은 날개가 크나
나는 것은 새(鳥)를 따르지 못한다.

말(馬)은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으나
사람이 타지않으면 스스로는 가지못하며,

사람은 구름을 능가하는 높은뜻(志)이 있어도 운(運)이 따르지 않으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

문장(文章)이 세상을 덮었던 공자(孔子)도
일찍이 진(陳)나라 땅에서 곤욕을 당하였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강태공(姜太公)도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보냈다.

도척이 장수(長壽)하였으나
선량한 사람이 아니며,

안회(顔回)는 단명(短命)하였으나
흉악한 사람이 아니다.

요순(堯舜)은 지극한 성인(聖人)이나
불초한 자식을 낳았으며,

고수는 우매(愚昧)한 인물이나
도리어 아들은 성인(聖人)을 낳았다.

장량(張良)도 원래는 한미한 선비였고,
소하(蕭何)는 일찍이 작은 고을의 현리
(縣吏)였다.

안자(晏子)는 키가 오척(五尺) 미만이나
제(齊)나라의 수상(首相)이 되었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초려(草廬)에서 은거(隱居)하였으나
능히 촉한(蜀漢)의 군사(軍師)가 되었으며,

한신(韓信)은 닭(鷄)을 잡을힘도 없었으나
한(漢)나라의 대장(大將)이 되었다.

풍당(馮唐)은 나라를 편안케 할 경륜이
있었으나 늙음에 이르도록 그 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고,

이광(李廣)은 호랑이를 쏠 수 있는 위력
(威力)이 있었으나 종신토록 봉후(封侯)
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다.

초왕(楚王)은 비록 영웅이나
오강(烏江)에서 자결함을 면치 못하였고,

한왕(漢王)은 비록 약하나 산하만리
(山河萬里)를 얻어 황제가 되었다.

경륜과 학식이 가득하여도 백발이 되도록
급제(及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재능과 학문이 성기고 얕아도 소년(少年)
에 등과(登科)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먼저는 부유하였으나 뒤에 가난한 사람도 있고, 먼저는 가난하였으나
뒤에 부유한 사람도 있다.

교룡(蛟龍)이 때를 얻지 못하면 물고기와
새우들이 노는 물속에 몸을 잠기며,

군자(君子)도 시운(時運)을 잃게 되면
소인(小人)의 아래에서 몸을 굽힌다.

하늘도 때를 얻지 못하면
해와 달이 광채가 없으며,

땅도 때를 얻지 못하면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물도 때를 얻지 못하면
풍랑이 일어 잔잔할 수 없으며,

사람도 때를 얻지 못하면
유리한 운이라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

옛날 내가 낙양(洛陽)에 있을 때
하루는 승원(僧院)의 차가운 방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게 되었는데
홑겹의 베옷으로는 몸을 가릴수 없었고
멀건죽으로는 그 배고픔을 이길수 없었다.

이때 윗사람들은 나의 무능함을 미워하고
아랫사람들도 나를 위압하였다.

사람들은 다 나를 천(賤)하다고 말한다.

이에 나는 말하기를 
이는 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운(時運)이며
또한 천명(天命)일 뿐이다.

그 뒤 나는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러
지위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직분은 만조백관(滿朝百官)을 통솔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징벌(懲罰)하는
권한을 잡았으며,

밖으로  나가면
채찍을 든 장사(壯士)들이 호위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미인이 시중을 들어준다.

입는 것을 생각하면
능라금단(綾羅錦緞)이 쌓여 있고,

먹는 것을 생각하면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하다.

이때 윗사람은 나를 총애하고
아랫사람은 나를 옹호한다.

사람들은 다 우러러 사모하며
나를 귀(貴)하다고 말한다.

이에 나는 말하기를
이는 귀(貴)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운(時運)이며
또한 천명(天命)일 뿐이다.

대저 ᆢ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귀(富貴)만을 받드는 것은 옳지 않으며,

빈천함을 업신여기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

이는 천지(天地)가 순환(循環)하며 마치면
다시 시작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2018년 10월 27일 토요일

와목무실 (臥木無實)

♡ 와목무실 (臥木無實)

고통 앞에 당신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

이런 선택을 하기 싫다면
고통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목이 마르기 전에
우물을 파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편안한 상태에서는
앞을 내다보기가 힘든 법이니까요.

폐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이
담배를 쉽게 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병을 예방하려고 먹는
비타민은 항상 까먹다가도,
아프면 약을 잘 챙겨 먹는 이유입니다

지금 잘나간다고
영원히 잘나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영업 이익 수십조 원의 대기업조차도
다음 먹거리를 위해 그리고 백년대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지금 잘나가고 있다면
지금 편안하다면
우리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잊어버린 꿈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새로운 배움을 갈망하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누운 나무에는
열매가 안 열리기 때문입니다.

2018년 10월 25일 목요일

고양이의 빈자리

📝 '고양이의 빈자리'
         - 시인  정홍기 -

부뚜막 위에 놔둔 생선 한 마리가 없어졌다/
필시 집에 있는 고양이가  한 짓이라고 판단한 주인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 급기야 집고양이를 죽이고 만다/
확실히 그 집고양이가 먹었다는 증거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최소한 네가 안 먹었어도 /
그 다음 의심이 가는 쥐새끼들이라도 /
잘 지켰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울분에 /
집고양이를 죽이는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집고양이를 살리려던 일부 식구들도 /
목청 큰 어른의 위압에 끌려 그 고양이를 죽이기로 합의했다./

집고양이가 억울하게 없어진 그 날부터 /
쥐새끼들에게는 만고에 거칠 것이 없는/
신세계가 펼쳐져 흥에 겨워 어쩔줄 몰라 날뛴다/

부뚜막은 말할 것도 없고 찬장이고 곳간이고 /
심지어 다락방, 안방까지 온통 쥐새끼들 독차지가 된다/
그것도 모자라 신나게 뛰어다니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기저기 구멍을 내더니 /
드디어 집기둥 밑둥지까지 갉아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비바람이 불던 날 /
겨우겨우 버티던 그 초가집은 소리도 없이 폭삭하고 만다/

이 나라가 처한 현실과 미래가 이꼴 아닐까?../
쥐새끼 세상이 되어 초가삼간이 폭삭하기 전에 시급히 비상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고 과제다/
집주인은 국민이다/
국민각자는 감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바짝차려야 할 때다!!/

(한얼학회 이사장) 😼....🐀🐀🐀

박목월 시인과 그의 아들 이야기

박목월 시인과 그의 아들 이야기

1952년 6. 25 전쟁이 끝나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 옷을 내밀고 아내는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속에서 진주가 생성되듯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성숙 하고 가치있는 삶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어 머 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지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 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을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
들어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께!''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 '이라고 칭찬해 주시더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헌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 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촐처:지인톡

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인상이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인상이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고대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생전에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긴
세기적인 화가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아기 예수의 초상을 그리고 난 후,
20여 년이 지나서 이번에는
예수의 12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중에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상을 그리려고,
모델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
몇 년을 찾았지만 못 찾았다.
.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에게서 어떤 교도소에 재소자가 있는데,
매우 교활하고 악독하게 생겨 유다의 모델로 적합할 것 같다는,
.
말을 듣고는 곧장 찾아갔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보기에도
매우 적합하고,
험악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
그래서 그는 죄수에게,
.
"그림을 그리는데 모델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더니,
..
그 죄수가 아는 체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20년 전 선생님께서
아기 예수를 그렸을 때,
그 모델이 바로 저입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죄수의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
"세상에 ! 똑같은 사람인데,
어쩌면 이렇게 얼굴의 인상이,
바뀌어 질 수 있단 말인가?"
.
그토록 온화하고 인자하게 생겼던
어린 시절의 얼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표독한 인상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그는 너무도 놀라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
사람의 살아온 행적이 그 사람의 인상까지도,
이렇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
사실화를 그리는 데 더 깊은 고뇌를 하였다고 한다.
.
똑같이 생긴 사람이더라도,
.
오늘과 내일, 사람을 대하는
이미지가 다를 수 있다.
.
똑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 있는데,
.
그것은 다름 아닌 풍기는 인상과,
그 사람의 감정 상태 차이 때문이다.
.
따라서 평소 좋은 감정을 갖도록 노력하고,
좋은 인상을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한다.
.
좋은 인상이란 잘생긴 생김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인상은 그 사람의 살아 온 연륜과 흔적의 산물로,
인품과 직결되어 있다.
.
자신의 인생철학과 삶의 태도 및
일의 습관,행동양식의 반복에 의하여 차곡차곡 쌓여져,
형성되는 것이 인상이다.

따라서 똑같은 사람이라도,
인상은 그 사람의 행동양태와,
생활습관에 따라 다르게 표출된다.

참 빨랐지 그 양반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 시집 '정말' 중에서
                
              ○ 이정록(1964~)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2018년 10월 10일 수요일

제2회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금메달 획득!!!


제2회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금메달 획득!!!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당당히 금메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세계문자학회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4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2차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1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이번 세계문자올림픽 대회는 세계 27개국 문자
(영어, 러시아, 독일, 우크라이나, 베트남,
폴란드, 터키, 셀비아, 불가리아,
아이슬란드, 에티오피아, 몰디브, 우간다,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남아공,
한국, 인도, 울드, 말라야람, 구자라티,
푼자비, 텔루그, 말라시,
오리아, 뱅갈리, 캐나다)가 경합을 벌였다.

각국 학자들은 대회에서 30여 분씩 자국 고유문자의 우수성을 발표했다.

세계문자올림픽의 심사기준은
▲문자의 기원
▲문자의 구조와 유형
▲글자의 수
▲글자의 결합능력
▲문자의 독립성 및 독자성
▲문자의 실용성
▲문자의 응용 개발성 등을 기초로 평가됐다.

세계문자올림픽은 가장 쓰기 쉽고, 가장 배우기 쉽고,
가장 풍부한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찾아내기 위한 취지로 열린다고 한다.

한글은 16개국이 경쟁한 지난 2009년 대회에 이어
또 다시 1위를 차지하면서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번 세계문자올림픽에서
1위는 한국의 소리 문자
2위는 인도의 텔루구 문자,
3위는 영어 알파벳이 차지했다.

이번 세계문자올림픽 대회 마지막 날 참가한
각국의 학자들은 방콕 선언문’을 발표하고
자국 대학에 한국어 전문학과와 한국어 단기반 등을 설치하는 등 한글 보급에 노력하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이날 채택된 방콕선언문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나라들과 유네스코에 전달될 계획이라고 한다.

566돌 한글날, 대한민국 한글의 우수성!!!
한글-세계문자올림픽서 ‘금메달’ 수상

2018년 10월 7일 일요일

선현들의 자취를 기리자 ! ! !


      선현들의 자취를 기리자  ! ! !

🎋
<<한 위대한 한국인을
   
    무릎 꿇고 추모하며>>

50년 전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환자가
숨을 거두었다.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다.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가 쏟아졌다.

옆에는 평생 수발하던 아내,
대(代)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큰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숨이 끊어졌다.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다.

전기 작가 이동욱씨는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전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서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이 찾아와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 한국인은 실제 관에 들어가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비난받았는지
나는 안다'는  절규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이 대통령 묘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알고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감옥에선 낮에는 고문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썼다.

그 책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다시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며…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이 대통령은 서문을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 질지 언정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맺었다.

평생 반일(反日)한 이 대통령을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볼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난 후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한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 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양상훈

2018년 10월 3일 수요일

↕" 8.3 조치 "↕


↕" 8.3 조치 "↕

1973년 대한민국 재벌의 탄생…
1973년은 1차 오일 쇼크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이 멈췄던 해이다.
승승장구하던 미국, 일본, 북유럽 국가들은 1973년을 기점으로 성장률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1973년을 기점으로 계열사가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1972년 8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사채동결조치” 때문이다.

믿기진 않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이끄는 대기업 현대와 삼성과 LG 같은 기업도 그 당시엔 모두 사채 빚에
허덕이며 밤마다 부도를
걱정하면서 회사를 운영
해야 했다.

은행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국민들은 저축을 할 여유가 없으니 은행엔 돈이 없었고, 대부분의 돈은 일제 시절부터 어둠의 방법으로 돈을 끌어 모은 사채업자들이
대한민국의 돈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하려면 이들
에게 돈을 빌리지 않고는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엔 사채에 대한 규제도 없었으니 이자는 매우 비쌌고, 기업이 열심히 일해서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조직폭력배는 물론 유력 정치인들과 연계되어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전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기업활성화를 위해 사채 빚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 1972년 8월 3일 전격적인 사채동결조치를 발표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기업들이
사채업자에게 빚졌던 계약관계를 모두
“무효”로 만든 것이다.
이는 분명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조치였다.

사채업자들의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하지만 사채 빚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업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야당과 일부 언론은 독재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했고, 사채업자들의 저항도 극심했다.
그들과 연결된 정치인, 조직폭력배도 같이 합세하여 대한민국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혼돈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972년 10월 유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17일 국회해산 및 헌법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1972년 12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91.5%의 지지로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하고 유신시대가
시작된다.

그 결과, 지하에 숨어 있던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기업들의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은 1971년 39억원에서 1973년 545억원으로 급증했으며,1973년 1분기 GNP 성장률은 전년 대비 19% 상승했다.
단 1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채업자들에게 은행에 돈을 넣고 기업에 투자하면 돈의 출처를 묻지 않을 것이며
세금도 감면해줄 것이라고 했고, 기업들에게는 최대한 더 많은 자회사를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면
세금 혜택을 주는 방법으로 경제 활성화를 이끌었다.

그때 구성된 것이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끈 30대 그룹이다. 대한민국 재벌은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비정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대한민국의 경제의 꽃은
이렇게 피었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경제는 발전시켰지만, 독재는 잘못했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다.
독재가 아니었다면, 사채업자들을 막을 수도, 비정상적인 경제조치도 취할 수없었다.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사회를 뒤집고, 그로 인해 피를 흘렸고, 발전했다.

단순하게 잘한 것,
못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그는 사채동결, 유신독재와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기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모든 비판을 감수하고
독단적으로 나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리고 현재 부국강병을
이룬 대한민국이 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 결과만 있을
뿐이다.
혼란의 시대를 겪었고,
찬란하게 성장했다.

인류를 발전시키는 것은
다수의 군중들이 아니라
소수의 천재들이다.
연료가 없는 자동차는
움직이지않는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연료를 넣고
시동을 걸어야 움직이는
것이다.

한국이 이루어낸
경제발전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며,
한국인들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소수의 천재들이 있었고, 그들을 지휘한 지도자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에 기적은 경제발전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존재이다. 그러한 천재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기적 같은 부국강병을
끌어낼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