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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2일 수요일

실화: 소금장수

♡♡ 실화: 소금장수♡♡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수십 채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들이 포대가 놓여 있곤 했다.

13년째다.
아무도 누군지 몰랐다..
지난해에 ‘범인’이 잡혔다.

“나 혼자 여러 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다.

강경환(56). 충남 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부성염전'이라는 소금밭을 짓는 소금장수다.
그런데 보니,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 아닌가.

손 없이 염전을..?
또 서류를 살펴보니 그는 7년 전까지
그 자신이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빈한한 사람이 아닌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내가 남을 돕는다...?

소금장수 강경환은 사건이 발생한
연월일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1972년 12월 24일 오전 9시 40분.
1959년생인 강경환이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6학년 나이는 13세였다.

서산 벌말에 살던 강경환은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통을 닮은 깡통을 발견했다.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내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려댔다.
순간 앞이 번쩍하더니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다..!
안티푸라민이 아니라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
속칭 발목지뢰였다...

폭발음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달려와 경환을 업고 병원으로 갔다.

사흘 뒤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사라지고 없었다!
노래 잘해서 가수가 꿈이었던 소년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피를 너무 흘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살아났다.
하지만 “남 보기 부끄러워서” 중학교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 뒤로 3년 동안 경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며 살았다고 했다.
소년은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되도록 그리 살았다.

인생 포기했다.
“어느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친정에 가셨는데, 오시질 않는 겁니다.
배는 고프지… 결국 내가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어요.”
3년만이었다. 석달 동안 숟가락질 연습해서 그 뒤로 스스로 밥을 먹었다.

스스로 밥을 먹고 스스로 혁대를 차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농약먹고 죽으려고 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주막에 출근했다'고 말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어요.“
주막에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술로 살았죠.”

어느 날 유인물이 하나 왔길래 무심코 버렸다가
“아침에 유인물을 보니까 정근자씨라고,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거예요. 가서 들었죠."

"야,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반도 아닌데,
이 사람같이 못 살라는 법 없지 않나...”
강경환은 편지를 썼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나.” 답장이 왔다.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아주아주 훗날이 된 지금,
강경환은 이렇게 말한다...

“손이 있었다면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고, 새롭게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강경환은 훌륭하게 그 방법을 찾아냈다.

술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삽질을 익히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지독히 가난한 집이였다.

1994년,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너 염전 할 수 있겠냐?"

이미 1987년 교회에서 사랑을 만나 결혼한 가장이었다.
하겠다고 했다.

피눈물 나는 삶이 시작됐다.
농사 짓는 삽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손 몽둥이로 놀리는 방법을 익히면서 해야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 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펐다.
하루 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보람으로 일을 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인내라는 게 그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1996년 그 와중에 그의 머리 속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소금 한 포대가 1만원 가량 하는데,
여기에서 1000원을 떼서 모았죠.
그걸로 소금을 저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는 겁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다.
한달 월급 받고선 고된 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대신에
부부가 직접 염전을 지으며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아산의 한 복지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내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강경환 그는 말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대면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되서 돌아오고,
그 두 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에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그 나눔과 연결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2001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뗐다.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다.
수급자 수당 30만원이 날아갔다.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 6만원이 또 날아갔다.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다.

염전도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고,
여고생인 둘째딸 학비도 버겁다.
손을 내밀라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을 내밀라고.
작년에는 ‘밀알’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일.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더 도우려구요...
“한 30억원 정도 모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마음놓고 남 도울 수 있잖아요.

지금은 형편이 이래서 돕고 싶어도 어렵고…”
오늘도 부부가 소금밭에 나가서 소금을 거두는데,
손 없는 남편이 능숙하고 진지한 몸짓으로 소금을 모으면
아내는 얌전하게 삽으로 밀대에 소금을 담고, 남편이 그 밀대를 ‘손몽둥이’로 밀어 소금창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모습.
실로 장엄(莊嚴)했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마음'을 보았다.

2018년 12월 9일 일요일

수박장수 이야기

【유머】 수박장수 이야기

 

○경상도 수박장수는 이렇게 손님을 끈다.

"이 수박 사이소,

여 한번 묵어보이소.

둘이 먹다가 하나

뒤져도 모릅니데이."

 

○전라도 수박장수 :

"아따 묵어 보랑께요,

꿀 수박이여.

삼만 원에 팔던거

이만 원에 팔아부러.

싸게 싸게 오랑께요."

 

○충청도 수박장수 :

아예 수박을 팔 생각이 없는것 같다.

 

그래서 손님이 먼저 물어본다.

"이 수박 파는 거에요?"

 

그제서야 대답하는 충청도 수박장수.

"파니께 내놨겄쥬.

안팔라믄 뭐더러

이러구 있간디."

 

"이 수박 맛있어요?"

 

"별맛이 있겄슈. 수박 맛이것쥬."

 

손님이 다시 물어본다.

"아, 근데 이거 얼마에요?"

 

"까짓꺼 대충 줘유.

서울 사는 양반이 잘 알것쥬.

우리같은 이가 뭐 알간디유."

 

손님이 대충 오천원을 내고

수박을 가져 가려 하면..

 

충청도 수박장수가 수박을 뺏으며 이렇게 얘기한다.

"냅둬유. 소나 갖다 멕이게!"

 

'손님이 소보다 못한 놈이다'라는 얘기겠죠? ㅋ

 

손님이 미안해 하며 2만원을 건네면..

 

"가져가유. 소가 껍떼기만 먹지 알맹이를 먹는데유?"

 

손님이 수박을 잘라 맛을 보니 수박이 덜익어 싱거웠다.

"아니 이거 덜 익었잖아요?"

 

수박장수 왈,

"아이구 참, 단게 먹고 싶으믄

뭐덜러구 수박 사먹어유,

꿀을 사다 물 타서 먹지."

 

푸하하하하하....

 

어느덧 한 해의 거의가 지났습니다.

시간은 잡히지 않고 흐릅니다.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바람 지나듯

흘러 갈 거에요.

 

모든 시름..

바람결에 모두 날려 버리시구요.

 

2018년 12월 8일 토요일

잘 죽는 것도 실력이다 (1)

잘 죽는 것도 실력이다

병원에서 아버지가 임종하면서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아들아!
내가 죽거들랑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에이즈에 걸려서 죽었다고 그래라~!"
아들은 아버지의 임종 앞에 눈물을 흘리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위암에 걸려 돌아가시는 거잖아요?"
아버지는 남은 힘을 다 쏟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그래야 동네 사내들이
네 어머니를 안 건드릴 거 아니냐?“

+

죽을 때도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라도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잘 죽는 것도 실력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은 늘 문 앞에서 예기치 못할 방문을 하려고 웅크리고 있습니다. 너무 무서워 할 필요도 없지만 애써 무시할 수 만도 없습니다. 미리 잘 죽을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주변 정리를 해야 합니다.  병이 찾아오는 것을 대비해 잘 아플 준비를 해야 하고,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대비해 잘 죽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먼저 잘 아플 준비는 입원할 병원과 의사를 미리 지정하고 보험을 들어 의료비를 미리 마련해 두는 것과 혹 심 정지가 오면 연명 치료를 하지 말라는 문서를 작성하는 일입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소일 거리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좋은 방편입니다.  병은 지리한 시간과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병을 이길 수는 없지만 다스릴 수는 있습니다.

잘 죽을 준비는 죽음 이후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배려인 것입니다, 남은 재산이 있다면 배우자를 위해 남겨주고, 자식들에게는 선물처럼 조금씩 나눠주는 것입니다. 장기 기증을 유언으로 남기고, 아직 건강할 때 영상 편지를 제작하여 남기는 일 등입니다.

잘 아플 준비, 잘 죽을 준비가 없으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쉽습니다. 아픈 것도 자식 눈치를 봐야 하고 죽을 때도 마음을 내려 놓지 못할 수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존엄성이 사라지고 자식들에게는 미안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할 수 있다면 내 자존감을 지키고 마지막을 잘 정리할 수 있는 비용을 반드시 남겨둬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후회와 원망 대신 아름다운 추억과 존경의 모습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잘 죽는것도 실력이다. (2)


[세상사는 이야기] 
잘 죽는 것도 실력이다.

Music : 내 가슴에 달이 있다

요즘 들어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졌다.

친구 부모 님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80대 중반을 넘어선
부모님들은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 진다.

몇 달 전 나 역시
투병하던 시어 머님을 보내드렸다. 

애잔했던
어머니 인생을 떠 올리며 

슬픔에 목이 메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오래된 숙제를 꺼내 들었다. 

끝까지 존엄하게 살다 가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 

그 답을 찾은 곳은
또 다른 장례식장이었다. 

친구 아 버님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친구가 말했다. 

"미경아,
너 그거 아니? 

사람이 죽는 것도 
실력이 있어야 돼. 

그런 면에서 우리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실력으로

끝까지 스승 노릇 하셨어." 

고인은 반년 전 
암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 을 받으셨다고 한다.

갑자기 닥친 죽음 앞에서
당황 할 법도 하지만 

그분은 차분히
자신의 마지막을 준 비했다. 

혼자 살 아내를 위해 
자그마한 집으로 이사를 하고, 

재산을 정리해

자식들에게 
선물처 럼 조금씩 나눠주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남기셨 다. 

"사람은 마지막까지
잘 아파야 되고,

잘 죽어야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플 비용, 
죽을 비용을 다 마련해 놨다. 

너희들 사는 것도 힘든 데 
부모 아플 비용까지 감당 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냐. 

아버지가 오랫동안 준비해 놨으니
돈은 걱정 말고, 

나 가기 전까지
얼굴만 자주 보여줘라."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정한 병원에 입원하셨다. 

임종을 앞두고 선 
의사에게 심정지가 오면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고 

문서에 사인까지 직접 하셨다. 

자식들에게
아버지 연명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아픔을 절대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였다.

임종이 가까워서는
1인실로 옮기기로 미리 얘 기해 두셨다. 

자신이 고통에 힘겨워 하는
모습을 보 고 누군가 겁먹을 수 있으니

가족들과 
조용히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 

친구의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있다. 

가족들 모두에게 
각각의 영상편지를 남긴 것이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그리고 손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작별인사를 하며 
영상 끝에 이런 당부를 남기셨다고 한다.

"사랑하는 딸아, 
아버지가 부탁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하늘을 봐라. 

아버지가 거기 있다.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늘에서 기도할 테니

꼭 한 달에 한 번씩은 
하늘을 보면서 살아라.

힘들 때는 하늘을 보면서 
다시 힘을 내라."

그 분은 자식 들에게 
마지막까지 존경스러운 스승의 모습으로 

살다 가셨다.

어떻게 아파 야 하는지,
죽는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

존엄성을 지 키면서 
인생을 마무리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는 주로 뭔가를 '시작'할 때 
준비라는 단어를 붙인다. 

출산 준비, 결혼 준비, 취업 준비…. 
그러나 마무리에는

준비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는다.

은퇴 준비가 그토록 허술하고 
임종 준비라는 단어는

금기시 돼 버린 이유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60대 이후를 남은 힘, 

남은 돈으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자식 들 공부시키고
먹고 살기 바쁜 현실을 버티다 보면

어느새 거짓말처럼
노후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

그 때부터라도
정말 '잘 죽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 면 
자식들 형편에 따라서 아프고, 

자식들 돈에 맞춰서
병원에 끌려 다녀야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존엄성이 사라지는 데다 

자식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 때문에 있는 대로 
자식들에게 주지 말고, 

내 자존감을 지키고
마지막을 잘 정리 할 수 있는

비용을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후회와 원망 대신 

아름다운 추억과
스승다운 모습을 남길 수 있도록,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면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마지막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어디 보통 실력인가. 

나이 들수록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그런 내공은 갑자기 안 생긴다. 

육십이 넘 으면 고집이 세져서
남의 말은 안 들으니

스스로라 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이 담긴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다. 

그렇게 애 써야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지 
결정 할 수 있다.

잘 죽는 것이야 말로
한 사람 의 인생이 담긴

진짜 실력이다.

아들 부시대통령의 추도사를 번역

아들 부시대통령의 추도사를 번역
감동적이라 전달합니다.

미국에 살며 놀란 것들 중의 하나가 그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들의 삶이라고 힘들지 않고 슬프지 않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런 중에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으며 가볍고 경쾌하게 살아간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 어느 아들에게 슬프지 않을까? 하지만 한 시대의 영웅을 보내며 그가 마주한 삶에 대한 에피소드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무겁지 않게 정겹게 표현한 아들 부시의 가슴 뭉클한 추모사를 공유하고 싶어 번역을 해보았다.

미국의 전 대통령으로가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에 합격을 했으면서도 2차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대학 진학을 미루고 입대하여 비행기 조종사로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운 노블리스 오블르제를 실천한 진정한 시민으로, 태평양 상공에서 격추되어 바다 한가운데 구명정에서 적보다 아군의 구조대가 자신을 먼저 발견하기를 홀로 신께 간절히 기도한 믿음의 사람으로,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자신이 나중에 공직에 나서게 되며 알려질 때까지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겸손한 인간으로 그를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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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 여러분, 공무원, 외국 고위 인사, 친구들 : Jeb, Neil, Marvin, Doro, 그리고 우리 가족을 포함하여 오늘 와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가능한 한 늦게 그러나 젊게 (살다) 죽는 것이 좋다."라고 이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웃음)
85 세의 George H. W. Bush가 가장 좋아하던 취미는 그의 보트 Fidelity호의 300 마력의 엔진 세 대를 켜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즐겁게 날 듯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경호원들의 보트는 그를 따라잡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구요.

90 세의 George H. W. Bush는 항공기에서 낙하하여 Maine 주의 Kennebunkport에있는 St. Ann 's by the Sea 교회의 마당에 내렸습니다. 그 교회는 할머니가 결혼한 곳이었고 또한 아버지 자신이 예배에 자주 참석했던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낙하산이 혹시나 편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아버지가 그 장소를 선택했다고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웃음.)

90 대 때의 어느날, 그의 친한 친구인 제임스 베이커 (James A. Baker)가 그레이구스 보드카 한 병을 그가 입원해 있던 병실로 몰래 가져왔을 때 그는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Baker가 Morton's에서 배달 시킨 스테이크와 잘 어울렸을 것입니다. (웃음.)

그의 마지막 날까지, 아버지의 인생에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나이가 들수록 존엄과 유머와 친절을 간직하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한 주님께 마침내 부름을 받았을 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주님의 약속 안에서 용기와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빠가 젊게 살다 죽는 방법을 알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젊었을 때 이미 거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십대 였을 때, 포도상 구균 감염으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몇 년 후 그는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아군의 구조대가 적들보다 먼저 그를 발견 할 것을 기도하면서 구명보트에 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를 위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죽음에 가까이 갔던 경험들 때문에 그는 삶이라는 선물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바빴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야외 활동을 좋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는 개들이 사냥감들을 찾아내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농어 낚시를 좋아했습니다. 한때 휠체어를 이용하여야 했을 때, 워커 포인트 (Walker 's Point)에 있는 뒷쪽 현관에서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대서양의 거대함을 대해 생각에 잠기는 것을 행복해 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수평선(미래의 뜻)은 밝고 희망적이었고 그는 진실로 낙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낙관주의가 그의 자녀들을 인도하였고 우리 각자에게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대담한 결정으로 자신의 삶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는 애국자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대학 입학을 보류하고 해군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세대 중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공적 인물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하게 될 때까지 자신의 군 복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때서야 그가 완수한 임무였던 치치 지마 (Chichi Jima)에 대한 공습과 그곳에서의 그의 비행기의 격추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의 평생 동안 잊지 못한 그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구조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대담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안락한 동부 해안에서 그의 젊은 가족을 텍사스의 오데사로 옮긴 것입니다. 그와 엄마는 건조한 텍사스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그는 관대한 사람이었고 친절한 이웃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엄마와 제가 사용하던 우리 작은 주택의 욕실을 어떤 여성분들에게도 사용하도록 해주었는데 심지어 그분들의 직업이 ‘밤거리의 여인들’인 것을 알고난 이후에도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웃음.)

아버지는 모든 배경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는 공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혈통보다 성격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그는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 사람에게서 그의 가치를 찾으려 했고 항상 발견했습니다.

아빠는 공공 봉사가 고귀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고 또한 정직하게 봉사할 수 있고 신앙과 가족 같은 중요한 가치에 충실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와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베푼는 사람의 영혼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수천 개의 빛 중 가장 밝은 빛이었습니다.

승리했을 때, 그는 공을 나누었고, 패배했을 때 그는 그 비난을 짊어졌습니다. 그는 실패도 완전한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실패에 의해 구속받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좌절이 어떻게 삶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지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실망은 어린 자식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Jeb과 나는 너무 어려서 우리의 3 살짜리 누이가 죽었을 때 그와 엄마가 느꼈을 고통과 고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없는 믿음의 사람인 아버지가 매일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신의 사랑과 우리 어머니의 참되고 오랜 사랑에 의해 지탱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소중한 로빈을 다시 안아줄 것이라고 항상 믿었습니다.

그는 잘 웃었는데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웃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남을 골리고 장난을 치더라도 결코 악의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좋은 농담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심슨이 말하기를 원했습니다. (웃음.) (전 상원의원 심슨은 이날 추도사를 하면서 많은 농담을 사용하며 부시를 기렸다.) 이메일을 통해 그는 친구들과 최신 농담을 나누거나 받았습니다. 농담의 수준에 대한 그의 등급 시스템은 그를 잘 말해줍니다. 드물게 있었던 7 점이나 8 점은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나머지 대부분은 별 재미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웃음.)

조지 부시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친구가 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대하고 베푸는 마음으로  많은 친구를 만들고 그 우정을 지켜나갔습니다. 그가 친구들을 격려하거나 함께 슬픔을 나누거나 감사하기 위해 수 천 개의 손메모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을 줄 수 있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그들의 삶에서 스승과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들었고 위로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친구였습니다. Don Rhodes, Taylor Blanton, Jim Nantz, Arnold Schwarzenegger, 그리고 아마도 가장 예상 외인 사람인, 그를 선거에서 패배하게 만든 Bill Clinton도 그 중의 한 명입니다. 나와 형제들은 이 그룹의 사람들을 "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 이라고 지칭합니다. (웃음)

그는 그 어떤 하루도 낭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전설적인 페이스로 골프를 쳤습니다. 저는 왜 그가 스피드 골프를 주장하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골퍼이기도 했거든요. 음, 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빠르게 경기를 하고 다음 행사를 참가하고,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보내고, 또 막대한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단지 두 가지 설정만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 최대 출력으로 살기, 그리고 잠자기. (웃음)

그는 훌륭한 아버지, 할아버지, 위대한 상할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확고했고 우리가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섰을 때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는 격려하고 위로했지만 결코 우리를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랬습니다. (말썽을 피웠다는 뜻) (웃음) 그러나 그는 언제나 무조건적인 사랑의 위대한 선물로 답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을 때,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받으신 분이 "그가 들을 수는 있는 것 같은데 오늘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빠 사랑해요,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 였어요."라고 말했고, 그가 말한 마지막 말은 "나도 너를 사랑한다" 였습니다.

우리에게 그는 완벽에 가끼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골프의 숏게임은 형편 없었습니다. (웃음.) 그는 댄스 플로어에서 Fred Astaire (유명한 댄서)는 아니 었습니다. (웃음) 그 위대한 남자는 채소, 특히 브로콜리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웃음) 게다가 그는 이 유전자적 결함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웃음)

마침내, 73 년의 결혼 생활 중 매일매일 아버지는 좋은 남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자기 연인과 결혼했고 그녀를 숭배했고 같이 웃고 울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아버지는 경찰 쇼의 재방송을 보는 것을 즐거워 하셨습니다. 볼륨을 크게 틀고 (웃음)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말입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여전히 강하셨지만,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은 엄마의 손을 다시 잡는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또 다른 특별한 교훈 또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봉사하고 용기있게 인도하며 우리 국민의 마음에 사랑으로 행동하는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서가 쓰여진다면, 조지 H.W. 부시는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었고, 탁월한 기술을 가진 외교관이었으며, 혁혁한 전과를 이룩한 사령관, 존엄과 명예로 그의 직무를 수행한 신사였다고 기록될 것입니다.

그의 미국 제 41 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큰 자동차와 더 많은 돈의 은행 계좌를 남겨 두는 것 만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충성스러운 친구가 되고 사랑하는 부모가 되는 법을 알려주고, 자신의 이웃과 마을을 자신이 왔을 때 보다 더 나은 곳으로 남겨두는 법을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하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성공하기 위해 바쁘게 살았다는 것에 대해? 아니면 타인의 아픈 아이가 좀 나아졌는지 물어보기 위해, 그리고 서로 친선의 말을 교환하기 위해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는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기를 원합니까?”

그래요 아버지, 우리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행동한 사람으로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당신의 품위, 성실, 친절한 영혼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울고 있지만, 위대하고 고귀한 남자, 최고의 아버지였던 당신을 알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슬프지만, 아버지가 (어려서 죽은 딸) 로빈을 포옹하고 엄마의 손을 다시 잡고 있다는 것에 같이 우리 함께 웃도록 합시다.

2018년 12월 6일 목요일

人生의 세 가지 싸움

人生의 세 가지 싸움

'빅톨 유고'에 의하면 人生에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고 했다.

첫째:
自然과 人間과의 싸움이다.
그는 이 싸움을 그리기 위하여
"바다의 勞動者"라는 作品을 썼다.
바다의 漁夫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추운 날씨와 사나운 波濤와 싸운다.
人間이 산다는 것은 自然과의 끊임없는 鬪爭이다.
自然은 우리에게 따뜻한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殘忍한 敵이요 라이벌이다.
科學과 技術과 機械는 人間이 自然과 싸우기 위한 偉大한 武器요, 道具다. 
人間이 산다는 것은 自然을 利用하고, 支配하고, 征服하기 위하여 항상 싸우는 것이다.

둘째:
人間과 人間끼리의 싸움이다.
빅톨 위고는 이것을 그리기 위하여 " 93년"이라는 作品을 썼다.

個人과 個人 간의 生存競爭에서부터
나라와 나라와의 戰爭,
民族과 民族의 싸움,
共産勢力과 自由勢力과의 鬪爭에 이르기 까지 人間世界에는 많은 싸움이 있다.

우리는 이런 싸움을 원치 않지만 生存하기 위하여 이 싸움을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生存을 위한 싸움과
自由를 위한 싸움과
正義를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우리는 싸우면 반드시 勝利해야 한다.
世上에 敗北처럼 憤하고 괴로운 것이 없다.
나라와 나라와의 싸움에서 敗北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轉落하는 것이요, 奴隸가 되는 것이다.

敗北는 自滅을 意味한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武裝이 없는 곳에 平和가 없고
힘이 없는 곳에 自由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世界史의 冷嚴한 現實이다.

끝으로:
自己와 自己와의 싸움이다.
가장 重要한 싸움이 있다.
그것은 내가 나하고 싸우는 싸움이다.

빅톨 위고는 이 싸움을 그리기 위하여 유명한 『레미 제라블』을 썼다.
聖書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이 名作은 쟝발장이라는 한 人間의 마음속에서...벌어지는 善한 自我와 惡한 自我의 內的 鬪爭의 記錄이다.

마침내 善한 쟝발장이 惡한 쟝발장을 이기는 勇敢한 精神的 勝利를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善과 惡의 싸움터다.
나의 마음속에는 恒常 두 自我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勇敢한 나와 卑怯한 나”
“커다란 나와 조그만 나”
“너그러운 나와 옹졸한 나”
“부지런한 나와 게으른 나”
“義로운 나와 不義의 나”
“참된 나와 거짓된 나”

이러한 두 가지의 自我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항상 싸움을 하고 있다.
내가 나하고 싸우는 싸움,
이것은 인간의 자랑이요 榮光인 동시에 苦惱와 悲劇의 源泉이기도 하다.
이 싸움이 있기 때문에 人間은 偉大하다.
철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 했다.

“人間 最大의 勝利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2018년 12월 5일 수요일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절박하면서도 가슴 아픈 소원인가.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런 꿈을 갖기에는 그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렵고 처참해서 그런 사치스런 꿈이나 희망은 다 저버린 것이 아닐까 .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사십 여년 전만 해도 쌀밥을 온 가족이 배불리 먹어 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 심지어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 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70년대초 아카시아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해 5월 하순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육영수 여사님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견딜수 있지만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편지를 하루에도 수십 통씩 받았었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 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신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도로는 물론 번짓수도 정리가 안 되어서 집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어물어 그집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 놓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찾아왔노라고 말하고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쓰러지다 만 조그만 초막 같은집에는 전기도 없이 희미한 촛불 하나가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방 아랫목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 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쌀밥이 아니라 산자락에서 따 온 흰 아카시아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혀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아무 말도 더 못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 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이야기를 말씀 드렸다. 영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보였다. 박 대통령께서도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이 천정을 쳐다보시면서 애꿎은 담배만 피우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시에는 미쳐 생각을 못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을 친다.

60년대초 서독에 가 있던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현지에서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벌기 위해 이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냥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하면서 야멸차리 만큼 무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이런 결심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증서에는 이런 뜻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돕고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가난뱅이 나라 대통령이 그들을 눈물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 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함께 70년대초 성남에서 만났던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김 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